최근 국내 언론을 보면,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소스 제공용’ 기사가 부쩍 늘었다.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것이 “외교적 우군의 상실”이라는 프레임이다. 표면적으로는 외교 우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미국의 투자 요구에 응하지 않는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요컨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해야 우리도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위험하다. ‘한미일 삼각 안보’라는 이름의 구호가 반복되면서, 그 반향으로 ‘북중러 협력체제’라는 또 다른 삼각이 탄생했다. 우리 스스로 대립의 무대를 깔아준 셈이다. 결국 한반도는 ‘누군가의 전략 실험장’이 되고, 한국 외교는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일본을 우군으로 삼는 조건이란, 본질적으로 한반도를 대립 환경으로 제공하는 전제가 작동한다. 그렇게 괭이갈매기 울음소리처럼 허망한 안보 동맹의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미국과 일본이 던져주는 비스킷’을 기다리는 자세를 만들어온 것이다.
냉정히 말해 한국에게 ‘외교적 우방’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안보 우방’이라는 명목 아래 조정당하고, 통제받는 관계가 이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 간 문제라기보다, 스스로의 낮은 지능과 의존적 사고의 문제였다.
“이제는 지능을 높여야 한다.” 외교란 어느 진영에도 예속되지 않는 기술이며, 주체적으로 균형을 세우는 행위다.
미국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현명한 외교’라는 말은, 외교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일부 언론이 내뱉는 외교 담론은 마치 을사늑약 시절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하다. 외교권이 여전히 미국과 일본의 손에 있다고 믿는 듯한 태도 말이다.
미국과 일본에 아부하는 것이 외교라고 착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적 비극이다. 불과 몇 해 전,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로 한국을 압박할 때, 일부 언론과 인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웃음이야말로 이 나라 외교의 부끄러운 민낯이었다.
아무리 일본의 보복이 행복했더라도, 최소한 표정으로는 감춰야 했다. 그것조차 하지 못한 채, 일본이 자신들의 정치적 상대방을 공격한 것이 자신들이 펼쳤던 “외교의 기술”이라 자화자찬하던 이들이, 지금도 외교를 논하고 있으니 씁쓸할 따름이다.
외교는 충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최손 존엄을 지키기 위한 지혜의 기술이다. 그리고 존엄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부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